There is no essence.

I who get more interested in social phenomena approach the essence of them, realizing that the nearer I approach, the clearer there is no essence. I think it has already been intrinsic in me or you, being judged and evaluated by the inherent values in our things. Therefore, if examined in that viewpoint, it begins to be understood why the power group of Korea has wanted to split all kinds of social systems so much so far: the right and the left, social classes divided on its economic structure, dominance and subordination, etc. Looking at a solid body made up through several layers of the strange flowers above, we get to know that the system of the body is organized rather dangerously than strangely, and the system looks like the contemporary society. And its vacant surface and inside are getting filled with our inherent images to completion. In the end, it's a story about the situation and point where we fill a surface that doesn't exist, and console and satisfy ourselves. 

There is no essence-Pensive Bodhisattva

45x45x95(H)cm, paper, urethane clear on paper,

There is no essence-Buddha

35x25x35(H)cm, paper, urethane clear on paper,

There is no essence-Guan In Bodhisattva

30x30x95(H)cm, paper, urethane clear on paper,

There is no essence-Dharma

40x33x48(H)cm, paper, urethane clear on paper,

There is no essence-Abandoned dog

20x20x45(H)cm, paper, urethane clear on paper,

사람은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낯설음, 두려움을 마주치며 살아갈까.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기되며 살아갈까.

아마 이번 시리즈의 가장 큰 화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전 시리즈를 통해 현대사회의 미묘한 문제점들을 보여주고자 했던 나는 결국 그 문제점들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혹은 사회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거나, 낯설음에 대한 극복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수많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는 또 다른 낯설음을 창조하고 두려움을 창조한다. 이것은 그 많은 종교들과 이념적, 정치적 영웅들을 통해 증명된다. 결국 이것은 또 다른 낯설음과 두려움을 통해 사회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장치역할을 하게 된다.

나의 작업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레이어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지며 이번에는 어떤 입체적 형상을 보여준다. 이 형상들은 종교적 성상이나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완벽하지 못하다. 관객은 나의 작업을 보며 본인의 뇌리 속에 박혀있는 내재적 이미지를 유추해내며 형상의 완성을 만들어 낸다. 그 형상은 전시장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관객의 머릿 속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다. 그 형상들을 통해 일정의 만족을 취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내재적 이미지라는 틀 덕분에 관객은 지적 유희는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한다. 그 확장하려는 의지, 칸트가 말하는 오성의 범주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어쩌면 이미 오래 전에 퇴화되었는지 모른다. 이번 나의 시리즈는 그 퇴화된 능력을 기억해 내라고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그 두려움이라는 무기를 통해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소통적 구조까지. 이 전 방위적인 구조 저 뿌리까지 깊게 자리잡고 있는 이 두려움은 낯설지가 않다. 하지만, 오성의 범주를 벗어나 그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미 퇴화되어버렸으므로 여전히 이 무기의 능력은 유효하다,

허虛와 진眞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하다.